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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송파구 천호대교 인근 얼음 조각들이 떠다니고 있는 한강 [연합뉴스]


조선 시대엔 날씨가 추워지면 서울 한강 변에 사는 사람들의 근심이 커졌습니다. 얼음 채취에 대한 부담 때문입니다.
조선 시대엔 한양과 지방의 세금 체제가 달랐습니다. 지방은 토지세·군역(軍役)·지역 특산품 등을 징발당했지만 한양에 거주하는 백성들은 이런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습니다. 대신 이들에게는 주택세와 한양이라는 도시를 유지하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임무가 할당됐습니다.
그중 한강, 그중에서도 한강진과 양화진 사이를 경강이라고 했는데 이곳 주민들은 얼음을 캐서 얼음창고까지 운반하는 일을 맡게 됐습니다. 이를 장빙역(藏氷役)이라고 합니다.

예전 기록을 보면 주로 겨울날 오전 2시에서 해뜨기 전까지 얼음을 채취했다고 하는데, 얼음의 1정의 크기는 길이 45㎝, 폭 30㎝, 두께 21㎝ 정도로 무게는 18.75㎏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운반하는 것은 그렇다 해도 얼음을 이 크기로 채취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을 1년에 20만 정 가량 만들어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한양 도성 주민들이 맡은 역 중에서는 가장 고된 일에 속했습니다. 워낙 힘들다 보니 이것을 피하기 위해 도망치기도 하고, 지역 주민들이 돈을 주고 민간업자를 고용해 얼음을 대신 납부하게 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지금이야 용산·마포·합정 등이 서울에서도 높은 집값을 자랑하는 핫플레이스가 됐지만, 당시엔 돈이 없는 하층민들이 어쩔 수 없이 거주하는 비인기 지역이었던 것이죠.


일제강점기 중 얼음이 두껍게 언 겨울철 한강에서 채빙(採氷) 작업을 하는 광경을 담은 사진엽서. ‘동빙고’나 ‘서빙고’와 같은 지명에서 알 수 있듯이 한강에서의 얼음 채취는 줄곧 이어져 내려왔다.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인 자본이 개입하여 ‘천연빙(天然氷)’이라는 사업의 형태로 존재하였다. 왼쪽의 설명문에 “내지인(內地人, 일본인)에게는 진귀한 광경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이렇게 어렵게 채취한 얼음은 조선 정부의 얼음창고인 동빙고와 서빙고, 내빙고 등으로 들어갔습니다. 얼음은 조선 시대에 귀한 물자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은 이 얼음을 왕실 제사에 쓰거나 정2품 이상의 문무 관료, 승지, 종친 등 특별한 이들에게 주기적으로 하사했습니다. 얼음을 받는다는 것은 특권의 상징이었던 것이죠.

18세기 얼음 수요가 치솟다
그러다가 18세기 들어 많은 변화가 일어납니다.
18세기는 상공업이 발달하면서 서울이 상업 도시로 성장하기 시작한 때입니다. 지금도 여유가 생기면 소고기를 먹으러 가곤 하는데, 조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민간인 가정에서도 점차 어류와 육류를 찾는 일이 늘어났습니다. 특히 소고기를 판매하는 전문점이 23곳으로 늘어날 정도로 소고기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습니다. 어류도 마찬가지여서 예전엔 말리거나 소금에 절인 생선을 먹는 정도였지만, 이때부터는 생물 형태로 찾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입'이 고급이 된 것이죠.

이때 필요한 것이 얼음입니다. 고기를 상하지 않게 보관해야 했기 때문이죠. 또 서해에서 잡은 어류를 싱싱하게 운반하는 냉장선, 빙어선(氷漁船)이 등장했습니다. 지금의 망원·합정 지역에선 이렇게 운반한 어류가 활발하게 거래됐습니다. 이렇게 민간의 얼음 수요가 늘어나자 그동안 정부 통제 속에 있던 얼음이 민간 영역으로 나오게 됩니다.


          생선이 상하지 않도록 위에 얼음 붓는 상인          


얼음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
당시 권력층은 사빙고(私氷庫)라고 해서 개인적인 얼음창고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 또한 예외적 특권이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성종의 친형 월산대군이 양화진에 지은 사빙고와 조선 세조 때 두 번이나 공신에 올랐던 강희맹이 합정이 지은 사빙고였습니다. 특하 강희맹의 집안은 300여년간 얼음을 민간에 판매해 큰 이익을 봤는데, 조선 정조 때 강경환은 한양 일대 얼음 사업의 '큰 손'으로 위세를 떨쳤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민간의 얼음 수요가 급증하자 강씨 집안에 강력한 도전세력이 나타납니다.
빙계(氷契)라고 불리는 조직입니다. 이들은 한강 일대 주민들의 부담을 줄인다는 명목으로 정조 6년인 1782년 정식 창설됐습니다. 한성부의 서리, 지금으로 치면 서울시 하급 공무원과 돈 좀 굴리는 일부 '큰 손'들이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들은 정부에 얼음 1만7000정을 무상으로 공급하는 대신 한양 얼음 사업의 독점권을 따냈습니다.
이들은 1만냥을 투자해 한양에 8개의 빙고를 건설하고 100만 정의 얼음을 저장했는데 당시 권력자들이 곳곳에 만든 사빙고에 비해 10배나 큰 규모였다고 합니다. 또 당시 정부가 소유한 동빙고와 서빙고 그리고 내빙고의 총 얼음 저장량(20만 정)보다 5배나 큰 규모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당시 한양에서 민간의 얼음 소비량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빙계는 이익을 단단히 챙겼습니다. 얼음 사업(장빙업·藏氷業)을 독점한 이들은 한강 일대 설치된 사빙고를 철거하는 한편 겨울에 물 위에 떠 있는 얼음을 싣는 고기잡이배들까지 단속했습니다. 그러면서 한양의 얼음 가격은 점차 치솟기 시작합니다. 품귀 현상이 벌어지면서 비싼 돈을 내고도 얼음을 구하지 못한 상인들은 생선과 고기가 상해가는 걸 봐야 했고, 얼음 가격은 재차 오르는 상황이 반복됐습니다.

그렇다면 얼음 사업은 얼마나 이익이 남았을까요.
냉동 기술이 열악했던 당시 보관된 얼음 중 3분의 2는 자연적으로 소모됐고 3분의 1만 판매가 가능했습니다.
다시 말해 18세기 정조 시대에 빙계는 연간 100만정의 얼음을 저장했으니, 이 중 3분의 1에 해당하는 33만 정 가량을 판매 가능한 상태로 확보했을 것입니다. 이중 약 20만 정을 정부에 공급했습니다. 1만 7000정은 무상으로 납품했고 나머지는 1정 당 1전씩 받고 팔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은 13만 정을 민간에 팔았습니다. 당시 기록 등에 따르면 이를 통해 연간 최대 10만냥 정도를 벌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빙고를 설치하고 그 외에 이런저런 비용을 제하고도 1년에 10배가량 수익을 본 것이죠. 얼음 사업이 얼마나 짭짤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죠.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한 장면           


한국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바로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인데, 서빙고를 털어 한 몫을 챙기려는 이야기를 다뤘습니다. 당시 상황을 보면 개연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민간 장빙업자들의 반격
상황이 이렇게 흐르자 그동안 얼음을 판매해왔던 장빙업자들이 이를 그냥 바라만 보고 있을 리가 없겠죠.
특히 300년간 얼음 판매업으로 번성했던 강세황의 집안에서는 더욱 그랬습니다. 민간 장빙업자들을 대표해 강세황의 후손인 강경환이 나섰습니다. 그는 집안의 권세와 자본을 이용해 관료들을 움직였습니다.

"지금 빙계가 다른 모든 빙고 영업을 일체 금지하고빙계가 설치한 8개의 빙고만 있으니 얼음의 양이 전보다 5분의 1로 줄어들어 얼음 가격이 올랐습니다. 얼음 가격이 오르므로 뱃사람은 얼음을 싣지 못하여 어물이 썩고 시전 상인들도 얼린 고기를 조달하지 못해 낭패할 지경입니다. 서울 주민들이 장차 어육의 맛을 모르게 되고 강변 주민들이 생계를 이어갈 방도가 없어졌습니다." (『정조병오소회등록( 正祖丙午所懷謄錄)』中)


           영화 '1724년 기방난동사건'은 18세기 한양 마포 지역에서 활동한 상인과 왈패들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당시 금군 최덕우가 올린 상소 내용의 일부입니다. 빙계를 타파해야 한다는 주장이죠. 그러자 빙고 관련 업무를 총괄하던 빙고 제조 정창성은 최덕우가 민간 장빙업자들의 사주를 받고 저런 주장을 한다며, 얼음이 부족하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고 반박했습니다. 반면 한성부에서는 민간에 얼음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라고 보고했습니다.

이렇게 정부 안에서도 빙계의 의견이 달랐던 것은 강경환 세력과 빙계의 사주를 받고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실을 보자면 얼음이 부족했던 것이 맞습니다.

어쨌든 상황이 이렇게 되자 조정은 결국 양화진을 기점으로 동쪽인 서강·마포·용산·뚝섬 등에서는 빙계가 얼음 사업에 대한 독점권을 갖도록 하고 그 서쪽인 합정 등에서는 민간업자들이 자유롭게 얼음을 판매하도록 하는 절충안을 냈습니다. 절충안이긴 했지만 사실상 강경환 세력의 승리에 가까웠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합정에는 강세황 집안의 얼음 창고가 있는 지역이죠.


영화 '1724년 기방난동사건'은 18세기 한양 마포 지역에서 활동한 상인과 왈패들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한번 독점권이 깨지자, 민간 장빙업자들은 슬금슬금 마포·용산까지 진출해서 얼음을 팔기 시작했고, 이것은 빙계인들의 분노를 불러왔습니다. 서로 왈패들을 동원해 물리적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 무렵 마포 일대는 관가에서 함부로 손을 쓰기 어려울 정도로 법보다 돈과 주먹이 앞서는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최근 성남시와 건설업자가 연루된 '화천대유' 의혹으로 시끄러웠는데 거대 이익이 걸린 사업에서 지방 공무원과 민간 사업자들이 유착하고 지역의 조직폭력배가 개입되는 일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시끄러웠던 얼음 사업을 둘러싼 각 세력의 충돌은 1787년 빙계의 얼음 사업 독점권을 허무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정조는 1791년에도 신해통공(辛亥通共)을 발표해 한양 도성 안에서 시전 상인들이 가진 독점권을 폐지했는데, 그런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결과적으로 보면 강경환 등 장빙업을 해오던 양반 가문의 승리로 마무리된 것이죠. 빙계의 독점이든, 권력과 유착한 양반 가문의 장악이든 어느 쪽도 조선의 상업 발달에는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훗날의 역사가 보여줍니다.

※이 기사는 고동환 『조선후기 경강의 냉장선 빙어선(氷魚船) 영업과 그 분쟁』, 『조선 후기 장빙역의 변화와 장빙업의 발달』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중앙일보, 2021년 12월 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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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옥 (Jongox Lim)


-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학과 학사. [지리교육학전공]

- 부산대학교 교육대학원 사회교육학과 석사. [지리교육학전공]

- 부산대학교 대학원 사회교육학과 교육학박사. [지리교육학전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