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3가 '귀금속 거리' 르포, 세계 최고 물동량.. 매장 수백개 달해, 한돈짜리 돌반지 달라하니 99.5% 내놔
'순도 두가지 통용' 아무런 설명도 안 해, 목걸이·반지 99.9% 제품은 거의 없어, 순도 논쟁 속 불량업자들만 배불려
지난달 28일 찾은 서울 종로3가 귀금속 거리. 세계 최고의 물동량과 집적도를 자랑하는 곳답게 수백개의 매장이 줄지어 있다. 대부분 ‘최고가 금 매입’, ‘최저가 판매’, ‘예물·귀금속 도매 전문’이라고 붙여놔 어디부터 발을 들여놔야 할지 매장을 고르기부터 쉽지 않다. 도매라고 쓰여 있지만 소매를 위주로 하는 대로변 가게가 있는가 하면,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 소매점과 똑같이 생겼어도 일반 소비자는 문전박대당하기 십상인 진짜 도매점이 있다. ‘○○ 금거래소’라고 적힌 간판도 곳곳에서 눈에 띄는데 공인 기관처럼 느껴지지만 정부가 설립한 KRX 금시장과는 관련 없는 일반 민간 판매업체다.
최고, 최저, 도매, 거래소란 말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듯 금은 소비자와 판매자 간 정보 비대칭이 심한 업종이다. 순금 매매의 경우도 그렇다.
소비자에게 순금은 24K와 동의어다. 도금이나 합금을 24K로 작정하고 속여 파는 경우가 아니라면 ‘순금=24K’라는 공식에 다른 게 틈입할 여지는 없다. 그래서 판매자가 순금 제품을 소개하면 그다음 디자인을 고르고 가격을 흥정하는 순서로 넘어가는 게 보통이다.
일반적인 형태의 돌반지는 땜 가공이 들어가지 않아 99.9%의 24K 순금으로 제작, 판매돼야 한다. 그러나 세계일보가 10개 매장에서 ‘24K 한돈짜리 돌반지’를 보여달라고 했을 때 모든 매장이 99.5% 제품을 소개했다. 순금에 99.5%와 99.9%가 있다는 걸 먼저 설명해 주는 경우는 단 한 곳도 없었다.
A매장 판매원은 “우리나라는 995부터 24K이기 때문에 살 때나 팔 때나 가격 차가 없다”고 했고, B매장에서는 “995라고 덜 받고, 999라고 더 받는 건 없으니 디자인만 보라”고 했다.
국내 금 시장에서는 ‘(제조)공장→도매→소매’ 사이 결제가 대부분 현금이 아닌 순금으로 이뤄진다. 따라서 금 순도 문제는 시장 참여자들에게도 무척 민감한 문제다.
공장과 도매 간 금 거래를 중개하는 D씨는 “금을 수수료로 받는 입장에서 당연히 999 이상의 순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일일이 순도를 확인하며 거래하는 건 아니다”라며 “그래서 아예 순금은 999 이상으로 통일하자는 움직임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잘 안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반대 의견도 팽팽히 맞선다. 정의철 한국순금협회(도매상 모임) 회장은 “한국에서 순금제품을 만드는 공장 대부분 직원 한두 명이 제품을 만드는데 (99.9% 이상 순도를 올릴 수 있는) 몇천만원 하는 레이저 땜기나 1억원짜리 프레스기를 들여놓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라며 “기표원에서도 그런 현실적인 부분을 인정해 기준을 만들었을 것”이라고 했다. 한 도매총판업자는 “제작 과정에서 금 함량의 손실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며 “이걸 줄이려면 장비를 모두 새것으로 교체해야 한다. 대다수 영세한 공장들은 감당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갈등의 골이 깊지만 논란의 단초가 된 표준고시 KS D 9537은 아무 힘을 못 쓰고 있다. 표준고시 자체가 준수 의무가 있는 법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기표원 관계자는 “(땜이 없는 순금 제품을 99.5%로 만들어 판 경우) 원래 불공정거래에 해당할 수 있지만, KS는 그런 문제를 다룰 권한은 없다”며 “KS 규정 자체가 잘못됐다기보다는 업계에서 995를 관행처럼 순금으로 판매하는 게 문제이므로 업계 자정능력을 키우는 게 먼저인 것 같다”고 전했다. 도소매 간 금 순도 논쟁이 평행선을 달리고, 당국은 수수방관하는 동안 소비자는 함량 미달의 24K 금을 사고, 누군가는 수십억원의 부당이득을 챙기고 있는 셈이다.(세계일보, 2020년 10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