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는 1861년 목판본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완성하였다. 대동여지도의 표지에는 “當宁十二年辛酉 古山子校刊”이라 하여 제작시기와 제작자를 명기하였다. 제작 시기는 철종 12년인 1861년에 해당하고 고산자(古山子)는 김정호의 자호(自號)이다. 대동여지도에는 지도유설(地圖類說)이란 글이 실려 있어서 지도제작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지도의 중요성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지도로는 형상을 살피고 지리서로는 수(數)를 밝히는 것이니, 왼편에 지도를 두고 오른편에 서적을 두는 것은 참다운 학자의 일임을 강조하였다. 좌도우서(左圖右書)의 원칙은 그의 여지학(輿地學)에서 핵심을 이루는 부분이다. 지도와 지지를 통일적으로 갖출 때 비로소 한 지역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 고대로부터 도지(圖志)는 위정자가 갖춰야 할 중요한 것으로 이를 기초로 할 때 제대로 국가를 다스릴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지도의 제작을 통해 김정호가 의도한 것은 손자(孫子)가 말한 바를 인용하는 데서 잘 드러나 있다. 즉, 세상이 어지러울 때 이를 틈타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광폭한 무리들을 제거하며, 시절이 평화로우면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중요한 수단으로 지도를 생각했던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지도에 대한 위정자의 사고와 동일하다. 따라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김정호라는 개인에 의해 제작됨에도 불구하고 관찬(官撰)의 지도와 다름이 없다. 개인의 학문적 필요에 의해 제작된 지도가 아니라 애초부터 치국(治國)의 중요한 수단으로 제작된 것이다. 김정호의 신분은 확실하게 기록되어져 있지 않지만 최상으로는 하급관리부터 천민이라는 신분을 두고 여러 저서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당시 신분적 한계를 지닌 개인이 대동여지도라는 방대한 지도를 목판으로 간행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동여도의 제작에 신헌(申櫶)과 같은 고위 무관이 참여하고 있던 사실로 미루어 대동여지도의 제작할 때에도 고위관료의 협조가 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1861년에 제작된 대동여지도는 이후 1864년에 한 번의 수정을 거치게 된다. 즉, “當宁元年甲子”년에 수정을 거친 지도가 다시 인쇄된 것이다. 목판본 지도의 수정 간행은 그리 흔치는 않다. 이것은 오류를 시정하고 정확한 지도를 만들려는 김정호의 남다른 열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수정한 사항을 보면, 오자(誤字)를 바로잡고 잘못 그려진 지형을 수정했으며 역명(驛名)과 같은 지명의 추가, 잘못된 군현 경계의 수정, 고현(古縣)의 위치 이동, 도로망의 수정 등 실로 미세한 부분까지 오류를 발견하여 수정하였다.
대동여지도의 형식상의 가장 큰 특징은 휴대와 열람에 편리하도록 고안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점은 지도가 제작자의 의도만을 반영하는 데에서 나아가 이용자의 입장에서 지도를 제작하려는 발상의 전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이용자가 한정될 수밖에 없는 필사본 지도와는 달리 목판 인쇄본으로 제작됨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수요에 부응할 수 있게 되었다.
  대동여지도 또한 동여도처럼 지도책의 형식에서 벗어나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의 형태로 만들었다. 대동여지도는 각층이 연속되는 일련의 지도로 되어 있고 그 각층의 지도를 순서대로 맞추어 놓으면 조선전도가 되도록 고안되어 있다. 우리나라 전체를 남북으로 22층으로 나누고 각 층을 첩의 형태로 만들었다. 또한 각 첩은 접을 수 있게 하여 휴대하는데 편리하도록 하였다. 지도를 접었을 때의 책의 크기는 가로 20cm, 세로 30cm로서 당시 서지류(書誌類)의 크기와 비슷하다. 이것은 지도의 한 면이 가로 17cm, 세로 23cm 정도의 청구도보다는 다소 큰 규격이다.
 대동여지도는 청구도처럼 기본적으로 경위선표(經緯線表)를 기초로 제작되었다. 이 때의 경위선(經緯線)은 현대의 경위도(經緯度) 개념이 아니고 평면상에 그어진 방격(方格)을 말한다. 한반도를 남북 22층으로 나누었는데 각층은 120리가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각 층을 동서 80리로 구분하여 접을 수 있게 하였다. 즉, 각층을 책의 크기로 접은 판의 크기는 동서 80리, 남북120리가 되는데, 남북이 22층이고 각층의 길이가 120리가 되므로 전체 남북의 길이는 2,640리가 된다. 청구도의 2,900리보다 260리가 줄어든 수치이다.    이는 남해안과 제주도 사이에 있는 바다 공간을 대동여지도에서는 목판을 절약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삭제한 데서 기인한다. 경위선표를 사용한 제도의 원리는 지도의 앞부분에 수록된 방괘축척표(方罫縮尺表)에 잘 나타나 있다. 
대동여지도는 전체가 227면으로 구성되어 있고, 여백을 제외한 지도 부분은 213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로 70리, 세로 100리 방괘(方罫)를 하나의 면(面)으로 편성하여 총 312면이 되었던 청구도와 비교하면 101면이 줄어든 수치다. 이렇게 줄어들게 된 것은 지도의 한 면이 대동여지도가 청구도보다 가로 10리, 세로 20리를 더 수용하고 도서(島嶼)를 육지에 근접하여 그렸기 때문이다. 한 장의 목판에는 지도 두 면(판)을 앉혀 목판의 매수는 126판이며, 뒷면에도 지도를 판각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목판 1면에는 지도 4면에 해당하는 내용이 들어 있어 목판은 총 60장 정도로 추정된다.
김정호가 판각한 대동여지도의 목판은 대원군에 압수되어 불태워졌다고 전해졌으나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발견되어 목판 압수 소각설은 사실 무근임이 판명되었다. 1995년 조사 결과 대동여지도 목판 가운데 11매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는 모두 김정호의 원작임이 확인되었다.    목판은 두께가 1.5cm 내외로 손잡이가 없으며, 규격은 가로 43cm 세로 32cm 정도이다. 목판을 절약하기 위해 앞면과 뒷면 양면에 걸쳐 지도를 새겼으며 목판의 재질은 피나무로 확인되었다. 이 목판들이 발견되기 이전에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목판 1장이 소장되어 있었으나 새로 발견된 목판들과 대조 결과 판각수법, 재질 등이 유사하여 진품으로 재차 확인되었다. 이처럼 대동여지도는 청구도보다 한 면의 지도가 포괄하는 면적이 훨씬 넓어졌고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으로 구성되어 열람의 효율성을 높여주고 있다.
즉, 청구도에서는 통상 건·곤의 두 책으로 구성되는데 건책에는 1, 3, 5의 홀수 층, 곤책에는 2, 4, 6의 짝수 층의 면을 동에서 서로 제책하여 두 권을 상하로 펴서 네 개의 도면을 동시에 볼 수 있게 하였으나 그 이상의 도면은 같이 볼 수 없는 불편함이 있었다. 그러나 대동여지도에서는 이러한 단점을 완전히 극복하여 모든 지역을 잇대어 볼 수 있게 만들었고 필요한 지역만 분리하여 휴대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그림 목판본 대동여지전도


                                      그림 대동여지도의 표지 및 방격표

지도의 내용과 표현 방식

 앞서도 언급했지만 대동여지도에서는 판각의 편리를 고려하여 동여도에 수록된 지명 가운데 중요도가 다소 낮은 지명들이 제외되어 있으나 13,188개의 지명이 수록되어 조선시대의 목판본 지도로는 가장 많은 지명을 수록하고 있다. 표 4-2와 표 4-3은 대동여지도에 수록된 지명을 각 유형별로 나누어 청구도․동여도와 비교한 것이다. 표 4-2에서 드러나듯이 대동여지도는 후대에 만들어졌지만 목판본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필사본인 청구도보다 내용이 다소 적음을 알 수 있다. 하천․누정․진보․포․부곡․교․평주․목장․리(里) 항목 정도가 청구도 보다 많을 뿐이고, 대부분의 항목이 적게 수록되었다.
대동여지도를 청구도와 비교했을 때, 가장 두드러지는 내용은 진보(鎭堡)와 부곡(部曲) 항목이다. 부곡(部曲)의 경우, 청구도에 140개의 지명이, 대동여지도에서는 665개의 지명이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지명(고지명)을 풍부하게 수록한 지도는 이전에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이것은 김정호가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업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진보(鎭堡) 항목의 경우에도 청구도의 29개 지명이 대동여지도에서는 400개로 증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대동여지도가 국방 태세의 정비라는 시무(時務)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제작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동여도와의 비교에서도 수록된 내용의 차이를 볼 수 있다. 산악·하천·방면 등은 동여도의 수록 내용이 대동여지도의 두 배에 해당한다. 역원·창고·진보 등의 항목은 두 지도가 비슷하다. 수록된 지명으로만 본다면 김정호의 3대지도 중에서 동여도가 가장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대동여지도는 판각의 어려움으로 인해 동여도의 지명을 상당 부분 줄였을 뿐이다.
앞서 살펴본 대동여지도의 지도표(地圖標)를 검토해 보면 대동여지도의 성격과 김정호의 제작의도를 간접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다. 즉, 김정호는 지도에 수록된 중요 항목에 대해서 지도표라는 기호식 표현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데, 전체 14항목을 제시하고 있다. 14항목은 영아(營衙)·읍치(邑治)·성지(城池)·진보(鎭堡)·역참(驛站)·창고(倉庫)·목소(牧所)·봉수(烽燧)·능침(陵寢)·방리(坊里)·고현(古縣)·고진보(古鎭堡)·고산성(古山城)·도로(道路) 등이다. 대동여지도에는 이외에도 누정, 사찰, 사원(祠院) 등 문화적 요소들도 많이 포함하고 있지만 지도표에 수록된 것은 위의 항목뿐이다.
이들 항목은 국가의 행정, 군사, 재정과 관련된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긴요한 사항들이다. 특히 성지, 진보, 봉수, 산성과 같은 군사적 항목의 비중이 높은 것은 대동여지도가 행정적 용도보다는 국방의 필요에서 제작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김정호가 신헌(申櫶)과 같은 고위 무관(武官)의 후원을 받은 점과 대동여지도의 지도유설과 동여도의 여백에 쓰여진 군사와 관련된 주기(注記)는 이러한 가능성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19세기 빈번한 이양선의 출몰, 두 차례에 걸친 중·영(中·英)전쟁은 조선의 조야에 위기의식을 심어주었으며 이로 인해 국방의 정비는 중요한 사안이었던 것이다. 
동여도와 대동여지도가 수록된 내용에서는 거의 일치하고 있지만 표현 기법에 있어서는 대동여지도가 보다 더 정교한 느낌을 준다. 대동여지도의 산지 표현은 조선의 전통적 산천 인식체계의 반영으로 독립된 형태가 아니라 이어진 산줄기의 형태로 표현하였다. 이러한 점은 동여도와도 유사하나 동여도와의 가장 큰 차이는 산지의 험이(險夷)와 산줄기의 폭과 높이 등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이다. 동여도에서는 산줄기의 험준을 특별히 고려하지 않고 표현하여 동부의 험준한 산지나 서해 연안의 낮은 구릉성 산지가 같은 굵기로 처리되어 있다. 그러나 대동여지도에서는 산지의 형세에 따라 표현된 산줄기의 굵기가 다르고 산줄기가 모이고 갈라지는 지점과 높은 산이 있는 곳은 크게 강조되어 그려졌다. 특히 유명 산들의 봉우리가 흑색이 아닌 백색으로 표현된 것이 눈길을 끈다. 실제로 그의 지도유설(地圖類說)에서는 산지에 특치(特峙), 병치(幷峙), 연치(連峙), 참치(疊峙) 등으로 유형을 분류하였는데 실제 지도상에서도 산지를 일률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실제의 형세를 반영하려했음을 알 수 있다. 대동여지도에서 볼 수 있는 산지의 표현 방법은 외국의 고지도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것으로 우리나라 전통지도학의 특징으로서 지적되어 왔다. 산맥 위주의 지형표현과 백두산을 조종으로 한 산맥 표시, 삼태기 같은 지형과 취락의 주산표시 등은 풍수사상의 강한 영향으로 해석되고 더 나아가 김정호 역시 풍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학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하천의 표현에서는 쌍선과 단선을 혼합하여 그렸는데, 넓은 하구에서 차츰 좁아져 가다가 어느 지점에서는 단선(單線)으로 바뀌어 골짜기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방법은 강폭을 기준으로 삼는 현대지도의 수계표현 방식과도 유사하다. 이 또한 동여도와는 다른 표현 방식이다. 여기에서 쌍선에서 단선으로 바뀌는 기준은 몇 가지 근거를 통해 볼 때 당시 하구로부터 배가 올라와 운항할 수 있는 가항여부(可航與否)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단선으로 그려진 하천에서는 주요 간선도로 상에 나루터의 이름이 발견되지 않고, 국가에서 세운 조창(漕倉), 수참(水站) 등이 없는 점 등을 근거로 쌍선으로 그어진 유역까지가 당시 배나 뗏목의 운항이 가능했던 하천이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정호의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는 동일 축척에 의해 제작되었다. 각각의 지도는 10리 방안을 사용하였는데 방안의 크기가 2.5cm로 일치한다. 따라서 실제의 10리 거리를 지도상에 2.5cm로 축소시킨 것인데 정확한 축척을 계산하기 위해서는 과거 조선시대의 10리가 현재의 미터법으로 얼마에 해당하는가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조선시대의 도량형이 전시기를 일관되게 하나로 통일되지 못했기 때문에 정확한 축척의 계산은 애초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조선시대의 도량형은 국가적 차원에서 공표하여 시행했더라도 시간이 경과하면서 각 지역별로 차이가 발생하였고, 특히 전란 이후 도량형 자체에 문란이 생기면서 통일된 기준과 원칙이 일관되게 적용될 수 없었다. 따라서 김정호의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에 대한 축척도 대략적으로 보아서 추정하는 수치일 뿐 정확한 축척을 제시할 수는 없다. 
또한 김정호의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가 현대지도와 같이 근대적 측량에 입각한 자료에 의해 투영법을 적용하여 제작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차가 생길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김정호의 지도 자체가 지역별로 정확도가 다르기 때문에 모든 도엽이 균등하게 10리를 현재의 2.5cm로 축소해서 그렸다고 보기도 힘들다. 따라서 실제 도면을 가지고 축척을 산정하는 것도 무리가 따른다. 즉, 현재의 지도와 비교하여 김정호의 지도가 어느 정도 축소되었는가로 축척을 계산하는 것인데 현재와 달리 지역별로 많은 오차와 왜곡을 지닌 김정호의 지도를 일대일로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지도의 축척 계산은 김정호 지도의 제도 원리라 할 수 있는 방괘도(方罫圖)를 기초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저서들에서 김정호 지도의 축척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어왔다. 지금까지 발표된 대동여지도의 축척은 계산 근거가 제시되지 않은 경성제국대학의 1:150,000, 홍이섭의 1:160,000과 계산 근거가 제시된 축척으로 방동인의 1:133,333, 이찬의 1:160,000, 성남해의1:216,000 등인데 이들 축척은 10리를 기준으로 하고 있다. 또한 현대 지도를 축척 계산 근거로 제시한 김상수의 1:166,000∼1:168,000, 원경렬의 1:165,000∼1:168,000과 한균형의 1:164,000 이 있다. 
이와 같은 다양한 축척의 논의는 크게 2가지 정도로 압축된다. 즉, 10리를 약4.2km로 보는 견해에 의하면 축척은 약 1:160,000이 되고, 10리를 약 5,4km로 보는 견해를 따르면 축척은 약 1:216,000이 된다. 1:160,000 계열의 축척을 주장하는 견해는 지도의 크기와 실제 지표면의 크기를 대비하여 축척을 계산한 것으로 면적·지점간의 거리 등으로 계산한 것이다. 1:216,000의 축척은 경위도 1도의 거리 관계에 대한 기록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김정호 지도의 축척에 관한 다양한 논의는 이전 시기 대동여지도 연구의 주요한 부분을 이루었고, 측지 및 측량학 등 지리와 관계된 학문 에서 대동여지도의 축척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키기도 했다. 
전통시대 지도의 정확한 축척을 계산하는 것은 원래부터 한계를 지니고 있다. 조선시대 전 시기를 관통하는 도량형의 일관된 기준이 정립되어 있고 그것이 정확한 수치로 제시되어 현재의 척도 단위로 환산이 가능하다면 김정호 지도의 축척도 계산이 가능하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도량형의 기준이 일정치 않다면 이러한 축척 계산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리(道里)의 계산에 사용된 척도의 단위와 척도 기준의 변천, 지역적 차이 등에 대한 선행적 검토가 행해져야 축척에 대한 대략적인 접근도 가능할 것이다. 
또한 1:216,000 축척에서의 산출은 조선시대의 10里를 약 5,4km로 보아 1:216,000이라는 축척을 산출한 견해도 있지만, 다른 산출근거는 조선시대 법전에 수록된 주척(周尺)의 기준에서 이를 산출하고 있기도 하고, 정상기의 동국지도에 사용된 백리척을 이용하여 축척을 계산하기도 한다. 

대동여지도의 공간적 정확성
대동여지도는 19세기 당시로는 조선지도학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지만 정밀한 경위도 측량이나 거리, 방위 측정에 기반을 둔 측량 기술의 미비로 현대 지도와 비교했을 때 다소의 오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림4.5>의 현대지도와의 비교에서도 드러나고 있듯이 북부지방 특히 함경도 지방에서 큰 오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오차의 발생원인은 중앙과의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고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변방이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인식의 수준이 낮은데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대동여지도의 공간적 정확성에 대해서는 대부분 현대 지도와의 윤곽선 비교를 통한 분석이 주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윤곽선을 비교해 보면 서해안과 남해안은 거의 차이가 없고 동북부 지방과 압록강 상류지방, 그리고 동해안의 울진 부근이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경도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당시 정확한 천문시계가 없었고, 우리나라의 교통로가 주로 남북방향으로 발달되어 있고 지형적 관계로 동서 거리의 측정이 부정확한 데서 기인했기 때문이다. 또한 공간적 정확성을 측정하였을 때 나타나는 중요한 특징은 전국적 차원에서의 정확성과 지역 차원에서의 정확성이 다른데, 지역 차원에서의 정확도가 보다 높다는 점이다. 그것은 조선시대 전도의 발전 과정이 도별도와 같은 지역도를 토대로 이뤄진 것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조선후기 보다 정확한 전도의 제작은 보다 정확한 도별지도의 제작에 힘입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대동여지도에 나타나는 지역 차원에서의 높은 정확도가 이를 증명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실 선 : 대동여지도, 점 선 : 현재지도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대동여지도와 현재의 지도를 같은 크기로 축소하여 이를 중첩시켜 두 개의 지도가 같은 차이점을 검토했다.
  대동여지도와 현재의 지도 비교에서 가장 큰 차이가 나타나는 곳은 북위 40도 이북이다. 다른 지역은 대동여지도의 영일만 지역을 동쪽으로 약간 이동하고 영흥만 부근을 서쪽으로 옮기면 현재지도와 거의 일치한다. 북위 40도 이북은 동서가 확장되고 특히 압록강 상류는 북쪽으로 확대되어 있다. 이러한 오차가 심하게 나타나는 지역의 특색을 다음 몇 가지로 설명할 수 있는데, 그것은 첫째 산간지역, 둘째 인구분포가 희박한 지역, 셋째 조선시대부터 개척한 지역, 넷째 잘못된 경위도의 측정이다. 이러한 특색을 감안할 때 김정호는 지도제작을 위해 이 지역의 자료를 충분히 수집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동여지도의 북부지방의 도로 중 10리마다 방점을 찍지 않은 곳이 여러 곳이 있다. 개마고원 지역 중 주요간선 도로가 아닌 내륙의 동서 도로는 거리를 나타낸 방점이 없다. 개마고원 지역에서 도읍간의 리의 수치가 나타난다고 해도 험준한 산간지역이므로 치선거리에 비해 과장되는 율이 클 것이며 그나마 리의 수치를 알 수 없는 도읍의 거리는 산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개마고원 지역의 도읍의 정확한 좌표를 측정했다면 지도상의 오류를 줄일 수 있는데 몇 개 안되는 도읍의 측정마저 잘못되어 지도상의 오류가 생긴 것으로 사료된다.
  대동여지도는 실학시대에 도입된 어떤 도법도 사용하지 않고 제작된 지도이다. 다만 10리마다 방격표를 사용하여 정방형 축척자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경선이 북쪽으로 갈수록 축소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축척표를 지도에 응용하면 북부지방이 실제보다 확대되서 나타난다. 따라서 북부지방이 동서로 확대된 것은 이런 원인도 있었기 때문이라고 사료된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청구도의 내용을 바탕으로 1861년 방안식 목판본으로 만든 전국 지도이다. 1861년은 또한 김정호가 대동지지를 저술한 해로서 청구도에서 나타나는 지지적인 내용이 대동지지에 수록됨으로서 지도에서는 지지적인 내용은 생략되어 있다.
축척도 청구도와 동일하여 약 16만분의 1로서 남북 22층으로 되어 있고 각층을 접어서 책자 같이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남해현(그림)은 19층 3면과 20층 2면에 그려져 있다.

경상남도 남해군과 통영시, 전라남도 여수시 일대에 걸쳐 있다. 가운데 보이는 섬이 현재의 남해도이다. 실제로는 平山浦鎭과 弥助項鎭 사이에 큰 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와 광여도의 경상도 남해현 지도는 비록 회화식으로 그렸지만 본 지도보다 더 실제에 가깝다. 조선지도의 경상도 남해 지도는 청구도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본 면의 남해도는 섬의 남북 폭에 비해 동서의 폭이 너무 길게 그려져 있다. 아마 도로를 따라 측정된 거리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지역은 해안까지 산지가 높게 형성되어 있어 도로를 따라 측정된 거리는 평면에서는 더 가깝게 그려야 한다. 대동여지도가 정확성을 기한 지도라고 하지만 세세한 부분에서는 실제와 다른 것이 많은 편이다.

그리고 대동여지도의 큰 오류 중 하나는 지금의 雪川이 원래 위치에 표기되지 않고 현재 尙州 부근에 표기되는 것은 초기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 비변사인지도는 남쪽이 위로 표기되었고 이후 지도제작에서 북쪽을 위로 바른 표기를 하는 과정에서 제작자의 오류라고 생각된다.

남해도에는 松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封山이란 숙종 이후 전선이나 조운선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민간의 이용을 금지시킨 국용목재 생산처이다. 船材로는 소나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松封山이란 명칭도 사용되었다.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봉산은 실제로 전체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또한 남해섬은 청색으로 감쌌으며, 도로는 검은색으로 표시했고 봉수가 있는 산은 붉은색으로 수록했다.

昌善島는 진주의 월경지였다. 원래는 興善部曲이었는데 후에 縣으로 승격되었다가 조선 초기까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으면서 主縣이었던 진주 땅으로 통폐합된 것이다. 창선도는 실제로 남해도에 훨씬 가깝게 있는데, 이 지도에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에 표기된 지명은
갈(葛) 곡포(曲浦)
구미조항(舊彌助項) 구정봉(九井峯) 금산(錦山) 난포(蘭浦) 노(櫓) 동천곶(凍川串) 마(麻) 목(牧) 목(牧) 문암(門岩) 미조항(彌助項) 사(沙) 상주포(尙州浦) 석(石) 설천(雪川) 성현(城峴) 세존(世尊) 소흘산(所屹山) 송봉산(松封山) 영상(岺上) 외(外) 우현(牛峴) 원산(猿山) 정(鼎) 조(鳥) 조(槽) 죽(竹) 죽(竹) 평산(平山) 평산포(平山浦) 고현(古縣) 관음포(觀音浦) (위치가 설천쪽에 있음) 남해(南海) 녹두산(鹿頭山) 대방산(坮方山) 덕신(德新) 망운산(望雲山) 목(牧) 삼봉(三峯) 적량(赤梁) 조(漕) 창선도(昌善島) 충렬사비(忠烈司碑) 흥선(興善) 등 46개 지명이다.

남해와 창선을 제외한 16개 섬(갈(葛) 노(櫓) 마(麻) 목(牧) 목(牧) 문암(門岩) 사(沙) 석(石) 세존(世尊) 외(外) 정(鼎) 조(鳥) 조(槽) 죽(竹) 죽(竹) 조(漕))이 표기된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청구도의 내용을 바탕으로 1861년 방안식 목판본으로 만든 전국 지도이다. 1861년은 또한 김정호가 대동지지를 저술한 해로서 청구도에서 나타나는 지지적인 내용이 대동지지에 수록됨으로서 지도에서는 지지적인 내용은 생략되어 있다.

축척도 청구도와 동일하여 약 16만분의 1로서 남북 22층으로 되어 있고 각층을 접어서 책자 같이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남해현(그림 13)은 19층 3면과 20층 2면에 그려져 있다.

경상남도 남해군과 통영시, 전라남도 여수시 일대에 걸쳐 있다. 가운데 보이는 섬이 현재의 남해도이다. 실제로는 平山浦鎭과 弥助項鎭 사이에 큰 만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실이 반영되어 있지 않다.

해동지도와 광여도의 경상도 남해현 지도는 비록 회화식으로 그렸지만 본 지도보다 더 실제에 가깝다. 조선지도의 경상도 남해 지도는 청구도와 거의 동일하게 그려져 있다. 본 면의 남해도는 섬의 남북 폭에 비해 동서의 폭이 너무 길게 그려져 있다. 아마 도로를 따라 측정된 거리를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 지역은 해안까지 산지가 높게 형성되어 있어 도로를 따라 측정된 거리는 평면에서는 더 가깝게 그려야 한다. 대동여지도가 정확성을 기한 지도라고 하지만 세세한 부분에서는 실제와 다른 것이 많은 편이다.

그리고 대동여지도의 큰 오류 중 하나는 지금의 雪川이 원래 위치에 표기되지 않고 현재 尙州 부근에 표기되는 것은 초기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 비변사인지도는 남쪽이 위로 표기되었고 이후 지도제작에서 북쪽을 위로 바른 표기를 하는 과정에서 제작자의 오류라고 생각된다.

남해도에는 松封山이 표시되어 있다. 封山이란 숙종 이후 전선이나 조운선의 船材를 조달하기 위해 민간의 이용을 금지시킨 국용목재 생산처이다. 船材로는 소나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松封山이란 명칭도 사용되었다.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봉산은 실제로 전체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또한 남해섬은 청색으로 감쌌으며, 도로는 검은색으로 표시했고 봉수가 있는 산은 붉은색으로 수록했다.

昌善島는 진주의 월경지였다. 원래는 興善部曲이었는데 후에 縣으로 승격되었다가 조선 초기까지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으면서 主縣이었던 진주 땅으로 통폐합된 것이다. 창선도는 실제로 남해도에 훨씬 가깝게 있는데, 이 지도에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지도에 표기된 지명은

갈(葛) 곡포(曲浦) 구미조항(舊彌助項) 구정봉(九井峯) 금산(錦山) 난포(蘭浦) 노(櫓) 동천곶(凍川串) 마(麻) 목(牧) 목(牧) 문암(門岩) 미조항(彌助項) 사(沙) 상주포(尙州浦) 석(石) 설천(雪川) 성현(城峴) 세존(世尊) 소흘산(所屹山) 송봉산(松封山) 영상(岺上) 외(外) 우현(牛峴) 원산(猿山) 정(鼎) 조(鳥) 조(槽) 죽(竹) 죽(竹) 평산(平山) 평산포(平山浦) 고현(古縣) 관음포(觀音浦) (위치가 설천쪽에 있음) 남해(南海) 녹두산(鹿頭山) 대방산(坮方山) 덕신(德新) 망운산(望雲山) 목(牧) 삼봉(三峯) 적량(赤梁) 조(漕) 창선도(昌善島) 충렬사비(忠烈司碑) 흥선(興善) 등 46개 지명이다.

남해와 창선을 제외한 16개 섬(갈(葛) 노(櫓) 마(麻) 목(牧) 목(牧) 문암(門岩) 사(沙) 석(石) 세존(世尊) 외(外) 정(鼎) 조(鳥) 조(槽) 죽(竹) 죽(竹) 조(漕))이 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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