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도읍지였던 부여 아닌 익산에 왕궁과 거대한 사찰 미륵사 세워 
왕권은 강화하고 귀족세력 약화시켜 국력을 다시 높이려는 의도로 보여
지난 2주간에 걸쳐 백제역사유적지구 중 공주에 있는 공산성과 송산리 고분군에 대해 살펴보았어요. 부여에 있는 관북리 유적 및 부소산성, 정림사지, 능산리 고분군, 나성도 알아보았고요. 더불어 무령왕과 성왕 등 두 도읍지에서 백제의 부흥을 위해 애쓴 왕들에 대해서도 다뤄보았지요. 이번에는 백제유적역사지구 중 마지막으로 전라북도 익산의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에 대해 알아볼까 해요. 물론 이곳에서 백제의 부흥을 위해 애쓴 또 다른 왕도 만나볼 거고요. 그럼 지금부터 639년으로 역사 여행을 떠나볼까요?

◇연못가에서 미륵삼존을 본 백제 왕과 왕비
639년 무렵의 어느 날이었어요. 백제의 왕과 왕비가 함께 사자사라는 절을 찾아가던 중이었지요. 사자사에는 지명법사라는 스님이 머물고 있었는데 지명법사는 신통력으로 당시 백제의 왕과 왕비에게 도움을 준 인물이었어요. 그런데 왕과 왕비가 용화산 아래 큰 연못가에 이르렀을 때 놀라운 광경을 보았어요.
"왕비, 저 연못 가운데 누군가가 보이는 것 같소."
"그렇습니다. 그 모습이 세 사람 같은데요?"
"연못 가운데 사람이 보인다니 참으로 신기하구려."
"폐하. 연못 속 세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미륵삼존입니다."
미륵삼존은 미륵불과 그 양옆에 있는 보살을 함께 일컫는 말이에요. 미륵불은 불교에서 미래에 나타날 부처님을 말하고요. 연못 속 세 사람이 미륵삼존임을 알아차린 왕과 왕비는 수레에서 내려 연못 속 미륵삼존을 향해 절을 올렸어요.

◇삼국유사에 나오는 미륵사 창건 설화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을 본 왕은 백제 제30대 임금 무왕이에요. 왕비는 무왕에게 미륵삼존을 보게 된 그 연못에 큰 절을 세워달라는 부탁을 했어요. 왕은 지명법사를 만나 연못을 메우고 절을 지을 방법을 물었고, 지명법사는 신통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연못을 메웠다고 전해져요. 무왕은 그곳에 큰 절을 세우게 했는데 그 절이 익산 미륵사예요. 삼국유사에 나오는 미륵사 창건 설화지요.
삼국사기에는 무왕이 백제 제29대 법왕의 아들이라고 나와 있지만, 중국 남북조시대 북조의 역사를 기록한 북사라는 역사책에는 백제 제27대 위덕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돼 있어요. 법왕은 제28대 혜왕의 아들이며, 혜왕은 성왕의 둘째 아들로 위덕왕의 동생이지요. 혜왕과 법왕 모두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죽었는데, 당시 백제 내부에서는 귀족 사이에 내분과 세력 다툼이 심했고, 왕실의 힘이 약해졌을 때였어요. 그때 시골에서 '마'라는 식물의 나무뿌리를 팔며 어머니와 살던 아이가 커서 법왕 다음으로 왕위에 올랐는데, 그가 바로 무왕이었다고 추측해요. 무왕을 위덕왕의 아들로 짐작하는 학자들은 무왕이 위덕왕의 정식 왕비에게서 태어난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시골에서 어머니와 살았을 것으로 생각하고요.

◇백제를 다시 일으켜세우려 했던 무왕

'무왕은 풍채가 뛰어나고 그 뜻과 포부가 컸으며, 기상이 높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무왕은 성왕과 무령왕처럼 백제를 다시 일으켜세우려는 큰 뜻을 품고 이를 과감하게 실천해 나갔어요.
신라에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계속해서 신라를 공격했으며,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으며 고구려를 견제하기도 했어요. 그러면서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을 지켜보며 백제가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따져보기도 했지요. 관륵이란 스님을 일본에 보내며 일본과도 외교 관계를 두텁게 했고요.
또한 무왕은 왕의 권한을 키워 정치적인 안정을 이루려 애썼어요. 왕의 힘을 널리 나타내기 위해 부여에 궁남지라는 인공호수와 섬을 만들었고, 법왕 때 터를 닦은 왕흥사라는 절을 짓기도 했지요.
무왕은 당시 백제의 도읍지였던 사비 즉 지금의 부여가 아닌 익산에 왕궁을 짓고 미륵사라는 거대한 절을 세우기도 했어요. 이를 통해 무왕이 백제의 도읍지를 부여에서 익산으로 옮기려 했거나, 익산에 따로 도읍지를 세우려 한 것이 아닌가 짐작해요.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가 이를 잘 말해주는 유적지이지요.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는
익산의 왕궁리 유적은 오층석탑을 비롯해 백제 시대의 절터와 궁터, 성터가 남아 있는 곳이에요. 즉 익산에 왕궁이 세워졌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주는 유적지예요.
익산 미륵사지는 미륵사가 있었던 절터로, 미륵사는 3개의 법당이 나란히 서고 법당마다 탑이 하나씩 있도록 설계되었어요. 3개의 절이 하나의 큰 절을 이루는 형식처럼 지어진 대규모 사찰이었지요. 미륵사지에 남아 있던 석탑은 우리나라 석탑이 어떻게 처음 만들어졌는지를 잘 보여줘요. 더불어 백제 사람들의 석탑 제작 기술이 얼마나 뛰어났었는지도 알려주는 훌륭한 문화유산이고요.
그런데 무왕이 익산으로 도읍지를 옮기려고 했던 까닭은 무엇일까요? 새로운 곳에 왕궁을 짓고 그곳을 도읍지로 삼아 자신의 세력을 키워 나라의 분열을 일으키는 귀족들의 힘을 누르려 한 것은 아닐까요? 즉 익산으로 도읍지를 옮기며 나라를 새롭게 정비하고 약해져 가는 백제의 힘과 기상을 다시 키우려고 말이에요. 그리고 익산은 무왕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으로 알려지기도 해요.

[함께 생각해봐요]
삼국유사의 서동설화에 보면 무왕이 왕이 되기 전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를 아내로 맞는 내용이 나와요. 미륵사를 세운 것도 왕비가 된 선화공주가 무왕에게 부탁을 해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하고요. 그러나 2009년에 미륵사지 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석탑을 만든 경위를 적어 놓은 금판이 발견되었는데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무왕의 왕후가 기해년(639)에 지은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어요. 즉 백제 귀족의 딸이 무왕의 왕비였다는 말이지요. 이에 따라 학자들은 여러 추측을 하고 있지요. '선화공주와 결혼했던 무왕이 사택적덕의 딸을 다시 왕비로 맞은 것이다' '선화공주는 신라의 공주가 아니라 신라 귀족의 딸이다' '선화공주는 백제 귀족의 딸이었다' 등등. 과연 어떤 추측이 역사적인 사실과 더 가까운 것일까요?(조선일보, 2015년 8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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