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아시아 중부에 있는 공화국. 정식명칭은 아프가니스탄공화국.면적 64만 7500㎢
인구 2817만 (2003)
인구밀도 42.8명/㎢
수도 카불
주요언어 파슈툰어·다리어(페르시아어)
종교 이슬람교99%(수니파 80%, 시아파20%)
통화 아프가니(Af)
환율 1달러=43.205Af(2004.2)
국내총생산 40억 5000만 달러
(2002) 1명당 170달러
무역수지 수출 12억 달러
(2001) 수입 13억 달러
설명
아시아 중부에 있는 공화국. 정식명칭은 아프가니스탄공화국(Islamic Emirate of Afghanistan). 면적 64만 7500㎢. 인구 2817만 (2003). 북쪽은 투르크메니스탄·우즈베키스탄·타지키스탄, 북동쪽은 중국, 동쪽과 남쪽은 파키스탄, 서쪽은 이란에 닿아 있다. 수도는 카불.
자연
북동에서 남서에 걸쳐 뻗어 있는 여러 개의 산맥은 힌두쿠시산맥으로 총칭된다. 북동쪽은 높고 남서쪽으로 갈수록 낮아진다. 최고봉은 노샤프산(7470m)이다. 이 산맥의 북쪽은 투르키스탄이라 하며 해발고도 수백m의 평지를 이루고, 기후가 온화하여 농업에 알맞다.
주요 하천은 모두 힌두쿠시산맥에서 시작하여 흐른다. 산맥 이북에서는 옥수스강이 파미르고원에서 비롯하여, 상류부는 타지키스탄·우즈베키스탄과 국경을 이루고 있으며 아랄해로 흘러 들어간다. 무르가브강은 북으로 흘러서 투르크메니스탄으로 들어간다. 산맥의 남쪽에서는 카불강이 동쪽으로 흘러서 파키스탄을 경유한 뒤 인더스강으로 흘러 들어간다. 헬만드강은 남서쪽으로 흘러서 이란과 국경 부근의 호수로 들어간다. 하리루드강은 헤라트평야의 관개용수가 되고, 그 일부는 이란과의 국경선을 이루고 있다.
기후는 지역, 특히 해발고도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건조기후로, 여름에는 건조하고 겨울에 주로 비가 온다. 수도 카불(해발고도 1766m)은 7월 평균기온 25℃, 1월 평균기온 -2.8℃이고, 평균습도는 1월에 73%로 최고이고, 6~7월에 38%로 최저이다. 연강수량은 약 300㎜이며, 70%가 1~4월에 내리고 7~9월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는다. 기온이 가장 높은 지역은 남서부로서 여름철의 최고기온이 늘 40℃를 넘으며 사람이 살지 않는 황야지역이다.
헤라트지방에서는 여름철에 <120일 바람>이라는 북풍이 불어온다. 남동부 산악지역에는 인도양의 계절풍이 불어 와서 여름철에는 비가 오고, 겨울철에는 건조하며, 연강수량이 500㎜ 이상이므로 삼림이 잘 자란다. 카불 서쪽 산지에 쌓이는 눈은 가을부터 겨울에 걸쳐 쌓였다가 서서히 녹아 내리기 때문에 주민들의 식수와 농업용수가 되고 있다.
역사
아프간족은 10세기 페르시아어로 된 지리서에 지금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국경부근의 산지주민으로 나타나 있고, 14세기의 역사서에서는 그 지역을 아프가니스탄이라 하였다. 아프가니스탄이란 <아프간족의 땅>이라는 뜻이다.
이 종족은 동쪽으로 진출하여, 15~16세기에는 인도의 델리를 중심으로 로디왕조와 수르왕조를 세웠다. 무굴왕조의 아우랑제브황제 때에 파슈툰어(語) 고전시인 후슈할 한하타크가 나타났다.
1722년 길자이계(系)의 아프간족이 에스파한을 점령하고 사파비왕조를 붕괴시켰다. 이 왕조 말기에 등장한 나디르 샤아프샤르는 아프간족을 쫓아내고 인도로 원정함으로써 델리를 일시적으로 점령하고 약탈하였다. 귀국한 나디르가 47년 암살되자 그 밑에서 아프간인 부대장이었던 두라니계인 아흐마드 샤가 고향 칸다하르로 돌아가 부족연합의 장(長)으로 추대되었다. 이것이 아프가니스탄 건국의 시작이다. 그는 동쪽과 서쪽으로 정복전쟁을 되풀이함으로써 영토를 확장시켰고, 그의 아들 티무르 샤는 도읍을 칸다하르에서 카불로 옮겼다.
19세기로 접어들자 아프가니스탄의 동쪽에는 무굴왕조 대신에 영국이 강적으로 나타났다. 한편, 북방에서는 러시아가 투르키스탄의 여러 한국(汗國)을 제압하여 세력을 확대시켰다. 영국과 러시아는 함께 아프가니스탄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두 대국 사이에서 동요하고 있던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태도에 초조해진 영국은 2회에 걸쳐 군대를 아프가니스탄에 투입했으나 모두 손해만 입었을 뿐 완전히 정복하지는 못했다.
압둘 라만(재위 1880~1901)은 전제군주로서 국내통일을 도모함과 동시에 영국과 교섭해서 아프가니스탄 국가 육성에 협력하게 했다. 1919년 영국으로부터 외교권을 양도받아 독립한 아프가니스탄은 서양화(西洋化)와 국수주의(國粹主義)의 양극 사이에서 동요하였다. 제 2 차 세계대전 후에도 동·서의 긴장 속에서 비동맹 중립을 견지해 왔다. 동·서로 접해 있는 파키스탄과 이란 두 나라에 대해 경쟁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북쪽에 이웃한 소련에 의존하게 되었다.
73년 왕족인 전 총리 무하마드 다우드가 국왕 자히르 샤의 외유 중에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제를 선언하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78년, 청년장교를 핵심으로 하는 쿠데타가 또 일어나 다우드대통령이 살해된 뒤, 누르 무하마드 타라키를 수반으로 하는 보다 좌익적·친소적인 체제가 출현했다.
79년 12월 기존 정권 수호라는 명분 아래 소련군이 침공하였다. 이어 벌어진 전쟁에서 소련군을 몰아내려는 반군 단체들이 게릴라전을 개시했다. 소련군 침공 후 게릴라군이 대부분의 농촌지역을, 소련군이 도시지역과 지방수비대 부근지역을 나누어 지배하며 대치상태가 계속되었다.
88년 4월 제네바평화협정 체결로 같은 해 5월 소련군이 철수하기 시작, 89년 2월 철수가 완료되었다.
92년 4월 게릴라가 대공세를 펴 14년간의 사회주의 정권을 붕괴시켰다. 이슬람집권평의회 S. 모자데디의장은 5월 내각을 발족시키고, 6월 B. 라바니의장에게 권력을 이양하였다. 12월 라바니는 임시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다양한 파벌로 구성된 무자헤딘(회교전사) 세력은 신정부 구성을 둘러싸고 주도권 다툼을 벌이며 무력충돌을 벌였다.
93년 3월 라바니대통령과 헤크마티아르의 총리 취임으로 정전에 합의하고 잠정적인 연립정권이 발족되었다. 그러나 대통령파와 총리파 사이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95년 2월 헤크마티아르파(파슈툰족 조직)가 탈레반(파키스탄의 지원을 받는 파슈툰족의 이슬람 학생 전사로 세력이 약 4만명이며, 최고지도자는 무하마드 오마르)과의 전투에 패하고 철수하였다. 96년 수도 카불을 점령, 집권에 성공한 탈레반은 97년 10월 나라이름을 아프가니스탄 이슬람수장국으로 고치고, 엄격한 이슬람식 사회질서를 강요했다.
99년 7월부터는 마지막 남은 반탈레반 연합체인 북부동맹에 대한 공세를 재개했다. 하지만 탈레반 정권은 98년 8월 케냐와 탄자니아 미국대사관 폭탄테러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된 사우디아라비아 출신 오사마 빈 라덴에게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그를 비호함으로써 미국 등 서방국가들과 갈등을 빚어왔다.
99년 11월부터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유엔의 제재가 시작돼, 국영 아리아나 항공의 해외취항과 외국인의 대 아프가니스탄 투자가 금지되고 탈레반의 해외 금융계좌도 모두 동결되어 경제가 극도로 열악한 상황에 처했다. 적어도 250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는 최악의 사태로까지 진전되었다.
거기에 2001년에는 오사마 빈 라덴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9.11미국테러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에 대한 보복공격을 퍼부었다.
결국 탈레반정권은 붕괴되었고 2001년 12월 과도정부가 성립되었다. 하미드 카르자이가 과도정부 수반으로 추대되었으며, 북부동맹이 외무, 국방, 내무장관 등 내각의 핵심요직을 맡게 되었다.
경제
아프가니스탄의 경제를 지탱해주는 것은 농업·목축과 같은 전통적 산업이다. 인구의 75~85%가 이들 산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그 중 약 200만 명이 유목민이다. 또한 천연자원도 빈약하여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이다.
다만 천연가스의 경우 세계굴지의 가스매장국 중의 하나이며 1967년 이후 생산되고 있다. 석탄은 모두 힌두쿠시산맥 이북 3곳의 탄광에서 생산되고 있어 수송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 밖에도 암염·청금석이 생산되며 카불에서 세공된다.
이 나라의 주요 산업은 농업인데 건조지대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인공관개가 필요하며 농지 면적은 관개용수량에 따라 규제된다. 관개방법으로는 대부분 하천의 물을 끌어들이는 것인데 서아시아에서 널리 볼 수 있는 <카나트> 또는 <카레즈>라는 인공지하수로에 의해 지하수를 지표로 끌어올리는 방법을 쓴다.
토지 보유의 특색으로 자작농이 많고 대토지 소유는 발달되어 있지 않다. 주요 농산물은 밀·옥수수·쌀·보리이며 환금작물(煥金作物)로는 면화·사탕무를 재배한다. 앨팰퍼·클로버는 가축사료로 중요하며 그 밖에 멜론·수박·포도·오렌지·견과류(堅果類) 등도 생산된다. 이러한 농업은 대부분 인력과 가축의 힘에 의존하고 있다. 사육되는 가축으로는 양·소·염소·당나귀·말 등이 있다.
주요 수출품은 채소와 건과물·견과류·어린양가죽·면화·융단·양털 등이다. 주요 수출 상대국은 유럽연합·중국·남아시아, 수입 상대국은 일본·유럽연합·중국·싱가포르이다.
그러나 계속된 내전으로 국토가 황폐화되고 경제는 피폐하였다. 가장 큰 도시는 카불이며 다른 주요도시로는 칸다하르·헤라트·마자르에샤리프·잘랄라바드·콘두즈 등이 있다. 도시의 거주지 대부분은 카불에서 남서쪽으로 칸다하르, 북서쪽으로 헤라트, 북동쪽으로 마자르에샤리프를 거쳐 다시 남쪽 카불로 돌아올 수 있도록 건설된 주요 순환도로를 따라 자리잡고 있다.
사회·문화
전체 인구 가운데 약 절반은 아프간족이고 거의 같은 수의 아프간족이 파키스탄에 살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파슈툰>이라 하고 인도쪽에서는 <파탄>이라고 한다. 인종은 코카소이드(코카서스인종)이고 파슈토어를 쓴다. 이것은 페르시아어와 마찬가지로 인도유럽어족의 인도이란어파에 속하며, 아라비아문자로 표기된다.
아프간족 다음으로 많은 종족은 코카소이드인 타지크족으로 약 27%를 차지하며 모어(母語)는 페르시아어이다. 그 밖에 몽골로이드인 우즈베크족(알타이어족인 우즈베크어)과 하자라족(페르시아어)의 인구가 많다. 소수의 힌두교도·시크교도를 제외하고는 주민의 99%가 이슬람교도이며 그 80%가 수니파, 20%(주로 하자라족)가 시아파이다.
이슬람교는 7세기 후반에 들어와 그때까지의 불교나 조로아스터교를 소멸시켰다. 건국 이후 아프간족이 지배민족으로 되어 있고 타지크족의 세력이 그 다음이다. 하자라족은 하층계급이었으나 공화제로 바뀐 뒤 고급관료를 배출하였다. 헌법상 파슈툰어와 다리어(아프가니스탄의 페르시아어 공식명칭)가 공용어로 규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페르시아어가 공용어·공통어이다. 정부는 아프간민족주의에서 파슈툰어의 보급에 힘써왔으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의복에 있어서 옷감의 재료는 솜과 양 또는 염소의 털이며 옷자락이 긴 셔츠와 통이 넓은 바지가 전통의상의 기본이다. 주식은 밀로 만든 빵이고 보리와 옥수수로 보충한다. 부식품으로 중요한 것은 유제품(乳製品)이며, 주로 우유를 가공하여 요구르트나 치즈로 만들어서 빵과 함께 먹는다. 육류로는 양고기를 주로 먹고, 음료는 차이며 홍차와 녹차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다. 가옥의 주요 재료는 흙벽돌이다. 여성의 지위는 변화되어 가고 있으며 여성들이 부르카라는 쓰개로 온몸을 가리던 관습도 1959년에 일어난 <목장혁명> 차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97년 정권을 거머쥔 탈레반 정부는 엄격한 이슬람식 사회질서를 강요했다. 특히 여성들의 교육, 취업의 금지는 물론 남성 가족의 동반 없는 외출도 허락되지 않았다. 심지어 얼굴을 가리는 부르카를 착용하지 않으면 당장에 체포, 구금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탈레반 집권기 최대의 만행은 2001년 3월 국제적 비난을 무릅쓴 채 세계최대의 불교 문화유산 중 하나인 높이 51m의 바미얀석불을 파괴한 일이었다. 그해 11월 수도 카불에서 탈레반 축출 후 여성 100명이 부르카를 벗고 행진, 여권 신장운동을 재개했다. 여성교육이 다시 실시되고 카불방송국에 여자 아나운서가 등장했다.
2002년 1월 22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아프간 재건국제회의에서 총 45억 달러에 달하는 재건자금을 제공키로 합의했다. 한국도 4500만 달러를 재건기금으로 제공했다. 같은해 12월 오슬로에서 열린 아프간지원그룹(ASG) 20여객국도 20억 달러의 원조를 제공키로 합의했다.
학교제도는 19세기말부터 시작되었으며 모든 교육이 무료이고 종합대학이 1개, 단과대학이 3개 있다. 국민의 교양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페르시아고전문학이며, 사디의 《장미원》 《과수원》등이 여전히 애독되고 있다. 전통문화가 잘 지켜지고 있는 반면, 저널리즘의 발달은 미숙한 상태이며, 모든 출판은 정부의 감독 아래에 있다.
한국과의 관계
한국과는 73년 12월에 외교관계를 수립, 75년 카불에 상주대사관을 개설했으나, 78년 공산정권 수립으로 인해 단교하였다. 단교 때까지 문화·경제·기술협정을 맺었으며, 이에 따라 10여 명의 아프가니스탄 기술자가 방한, 기술훈련을 받았다. 북한과도 1973년에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무역면에서는 2000년 대한(對韓) 수입 8409만 달러, 대한 수출 7만 달러이다.
아프가니스탄 : 국민소득이 제일 적은나라 (1989년 200$)
아프가니스탄
해방의 진실
엘라헤 로스타미 포비(Elaheh Rostami Povey)가 《사회주의 노동자》와 인터뷰를 가졌다. 그녀는 미국 침공 후 4년이 지난 지금 실제의 삶이 어떤지를 조사하기 위해 최근 아프가니스탄에 다녀왔다.
[사진 설명: 여성들은 이제 학교에 갈 수 있다. 그러나 남자와 동행하지 않고서는 집을 벗어날 수 없다]
아프가니스탄의 삶의 모습은 어떤가?
유엔 기구들과 몇몇 국제적인 비정부기구(NGO)들이 신뢰할 만한 보고서와 통계를 내놓았다. 그러나 이 보고서들은 결론이 없다. NGO들이 탈레반과 알 카에다 잔당의 보복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보통의 평범한 아프간 사람들과 섞이는 것이 용인되지 않는다. 물론 그들 가운데 일부가 용기를 내서 그렇게 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조사 연구원이자 작가로서 나는 이런 기구들이 제공한 정보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나는 아프간인 친구들과 함께 수도 카불(Kabul)은 물론이고 잘랄라바드(Jalalabad) 및 마자르-에-샤리프(Mazar-e-Sharif)를 여행하고 머무르면서 평범한 남녀의 경험에 관해 더 많은 것을 확인했다.
수 년간의 전쟁과 폭력적 갈등으로 아프가니스탄은 대량의 인명 손실과 추방, 물리적·환경적 파괴를 경험했다.
2001년 탈레반 세력이 붕괴하자 많은 아프간인들은 평화와 번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미국 주도의 침략이 자행되고 나서 4년이 지난 올해 유엔개발계획(UNDP)이 발표한 보고서는, 재건과 개발이 시급히 요청되며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이 취약한 국가가 쉽게 혼란과 절망적인 빈곤으로 빠져들고 말 것이라고 했다.
재건 사업에 투자된 재원은 거의 없다. 2,1000킬로미터의 도로 가운데서 겨우 2793킬로미터만이 포장되었다. 공항은 47개다. 그러나 포장된 활주로를 갖고 있는 곳은 열 개뿐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 겨우 세 개의 활주로만이 길이가 1,0000피트를 넘는다.
현재 카불에서는 지난 수 년간 시민을 살해하고, 강간하고, 테러했던 군벌들과, 해외의 계약자들이 버려진 재산을 징발해 대저택과 사업을 꾸리고 있다.
많은 건물이 손상된 채로 방치되어 있다. 어떤 경우에는 손상된 기초 위에 2층이나 3층이 지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학교와 병원들이 무너졌고, 사람들이 죽었다.
정부는 재건의 책임을 사적 부문에 맡겼다. 아프간 기업이 없는 상황에서 이것은 얼마 안 되는 재건 사업에 외국 기업과 군벌들이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국제 NGO들은 용역의 제공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처럼 그들은 지역적 차원에서 보건과 교육과 기타 서비스를 부분적으로만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유엔개발계획 보고서에 따르면 도시 지역 인구의 39%와 농촌 지역의 69%가 상수도를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어린이 여덟 명 가운데 한 명이 오염된 물 때문에 죽는다.
카불과 기타 도시 지역에서 전기는 하루 중 단 몇 시간 동안만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국제 기구들과 외국 군대는 독자적인 전기·상수도·석유 공급망을 갖추고 있다. 아프간 사람들은 이런 현실에 분노한다.
인간 개발 지수(Human Development Index) 또한 음울한 그림을 보여준다.
¤ 평균 수명 44세.
¤ 국민의 53%가 공식 빈곤선 이하에서 살고 있다.
¤ 성인 문자 해독률 29%.
¤ 여성의 3%만이 글을 읽고 쓸 수 있다.
¤ 일부 지역에서는 주민의 1% 미만만이 글을 읽을 수 있다.
¤ 30분마다 임신 관련 질환으로 여성이 한 명씩 죽는다.
¤ 어린이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이 5세가 되기 전에 사망한다.
약 7만 명의 교사가 돌아와서 일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 연간에 파괴된 학교의 절대 다수가 재건되지 않았고, 안전하지 않다. 교사와 책과 책걸상과 종이와 연필이 부족하다. 다른 교구는 말할 것도 없다. 많은 어린이가 오전 8시에 등교해서 오전 10시에 하교한다.
카불과 몇몇 다른 도시 지역에서 조금이나마 기술이 있고 교육을 받은 소수는 외국 기구들을 위해 일하고 있다. 그들은 아프간 국가와 민간 기관들보다 더 높은 보수를 제공한다.
한 달 평균 월급은 40달러이다. 한 달 평균 집세는 200달러이다. 한 달 평균 식비 및 기타 비용은 200달러이다. 빈곤이 대규모 부패로 이어졌다.
많은 경우에 3대가 함께 산다. 과밀한 주거 조건은 특히 젊은이들이 공간과 사생활 결여로 고통받게 한다.
해가 지면 어느 누구도 감히 밖에 나가려고 하지 않는다. 약물, 폭력, 어린이와 젊은 여성 납치가 만연해 있다. 보안 경찰의 총격이나 가두를 순찰하면서 빠르게 질주하는 차에 치일 위험도 존재한다.
난민 300만 명이 이란과 파키스탄에서 귀환했다. 그들은 카불과 기타 도시 지역에서 텐트 생활을 하고 있다.
나는 거리에서 구걸하던 한 젊은이를 만났다. 그는 파키스탄의 페샤와르(Peshawar)에서 NGO를 운영하는 나의 아프간인 친구들을 알아보았다. 페샤와르에서 그가 이 NGO가 설치한 학교에 다녔던 것이다.
카불에 돌아온 그는 거지가 되었다. 그는 페샤와르의 난민 시절이 더 나았다고 생각한다.
150만 명이 매년 아프가니스탄 각지에서 카불로 일자리를 찾아 들어온다. 탈레반이 붕괴한 직후 카불의 인구는 50만 명이었다. 현재는 500만 명이다.
대다수가 땅이 없고 집도 없다. 이 가운데 주로 남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란이나 파키스탄으로 건너가서 일자리를 찾고 돈을 벌어 가족에게 송금하는 것이다. 아주 가난한 사람은 이주는 꿈도 꾸지 못하며 절대 빈곤 속에서 살아간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식량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편 재배이다.
많은 사람들이 빚에 묶여 있다. 그들은 원금과 이자를 갚기 위해 아편을 재배해야 하고, 땅과 세간과 심지어는 어린 아이까지도 팔거나 저당잡힌다.
가족이 담보 노동으로 어린 소년을 보내 일 시키기도 한다. 많은 어린 소녀들이 갚아야 할 빚 대신으로 부유한 늙은이들에게 시집을 간다.
아편 가격이 비쌈에도 불구하고 빚은 겨우 일부만 상환할 수 있을 뿐이고 땅을 되찾는 일도 막막하다. 결국 그들은 재산을 처분해서 갚아야 할 돈을 댄다. 그들은 생존의 수단으로 더욱더 아편 판매에 의존하게 된다.
아편 소비 지역도 존재한다. 이곳에서는 주민의 상당수가 중독자다.
사람들은 수년 간 지속된 보잘것없는 영양 상태, 차가운 기온에서 잠을 청해야 하는 일, 여성의 경우 끊임없이 계속되는 임신이 야기한 지긋지긋한 고통 및 병마와 싸우기 위해 아편을 사용한다.
임신한 여성 중독자는 사산을 하거나 중독된 아기를 낳는다.
아편 소비는 가난한 가구에서 더 높다. 그들은 굶주림을 달래고, 조용히 시키려고, 또 아플 때도 자녀들에게 아편을 준다. 다수의 나이 든 어린이들은 아편이 없으면 학교에도 못 간다.
광범위한 아편 중독으로 부부 사이의 갈등이 빈발한다. 중독된 남성은 가족을 제대로 부양할 수 없고, 중독된 여성은 남편의 학대에 노출된다. 두 경우 모두 여성에 대한 폭력으로 이어진다.
여성의 지위를 개선하겠다면서 전쟁이 정당화되었다. 나아졌다는 증거가 있는가?
나아졌다는 증거는 거의 없다. 소녀들이 학교에 가기는 한다. 그러나 그 학교 건물들이 안전하지 못하다. 새 헌법은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고 선언한다.
그러나 지속되어 온 종교적·문화적 보수주의와 위해를 당할 수 있는 조건 등이 여성이 경제와 사회에 참여하는 것을 막는 진짜 장애물이다.
탈레반에 맞서면서 미국과 핵심 동맹 세력을 이루었던 지역 군벌들은 여성 권리의 옹호자들이 아니다. 침략군은 군벌들의 여성 처우에 관심이 없다.
아프가니스탄 대부분의 지역에서 군벌들의 총구에 의한 지배가 법의 지배보다 앞선다. 여성은 폭력과 공포와 협박 속에서 고통받고 있다.
카불 중심가를 제외하면 여성들은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고, 부르카를 쓰지 않거나 남성 가족 구성원을 대동하지 않고서는 여행도 할 수 없다.
아프가니스탄의 여러 지방에서 부모들이 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는다고 인권 단체 휴먼라이츠워치(Human Rights Watch)는 보고한다. 등하교 과정이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문 사이의 불화를 조정하거나 빚을 갚기 위해 소녀들이나 젊은 여성을 교환하는 습속이 계속되고 있다. 조기 강제 결혼률이 높은 것도 마찬가지이다.
서방 언론은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위성 TV와 볼리우드 영화, 이동 전화와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을 긍정적인 변화라고 전했다.
빈곤 수준과 전기 부족을 감안하면 이 나라의 열 개나 있다는 방송국을 이용할 수 있는 아프가니스탄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런 사치를 누릴 수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 선택이라는 것은 폭력이 판치는 미국의 경찰 영화나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복종을 찬양하는 볼리우드 영화를 보는 게 고작이다.
카불과 몇몇 다른 도시 지역의 젊은 남녀 극소수가 상대적 의미에서 싸구려 이동 전화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이 서로 문자를 주고받고 인터넷 카페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많은 보수적 가정은, 포르노 자료를 온라인 상에서 무료로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인터넷 카페를 딸들을 내보내기에 적합한 장소로 여기지 않는다.
많은 젊은 여성들이 감옥에 갇혀 있다. 그녀들을 거기로 보낸 사람은 남성 친척들이다. 내가 인터뷰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인 페제(Feze)는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와 삼촌과 사촌들이 ‘행실이 올바르지 못하다’며 나를 감옥에 가두었다.”
감옥에서 행해진 순결 검사를 그녀가 통과했지만 그녀는 몇 달 동안이나 갇혀 지내야 했다.
그녀는 말했다. “젊은 여성이 아버지한테서 행실이 바르지 못하다고 고소당하면 그 소문이 마을에 퍼져서 결혼을 할 수 없게 된다.”
출옥한 그녀는 가족으로부터 죽여버리겠다는 위협에 계속 시달리고 있다.
외국군의 주둔에 대해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외국인에 적대적이다. 알 카에다 용의자라며 맹인 남편이 집에서 끌려간 한 여성은 미국인들을 “카파르[kafar, 이교도]”라며 저주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녀의 집을 습격했고, 그녀의 문화를 경멸했으며, 그녀와 이웃을 협박해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이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의 자원을 훔쳐간다고 믿고 있다. 또 다른 인터뷰 대상자 나지아(Najia)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넓은 지역에 대규모 담장을 두르고 아프간인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나의 남편은 그들을 위해 일한다. 그들은 달러로 보수를 지급한다. 그래서 그들을 증오하는 사람들조차도 그들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가족을 먹여 살리려면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미국 군인들은 노상에서 주민들을 발로 차고, 욕하고, 구타한다. “마더퍼커(motherfucker)”라는 말을 너무 많이 써서, 아프간 사람들은 말뜻도 모르면서 외국인들을 향해 이 말을 사용한다.
아프가니스탄에 민주주의가 탄생했다고 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미국은 카불을 장악하고 있는 하미드 카르자이(Hamid Karzai)를 지원하는 일에 집중해 왔다. 다른 곳은 군벌들이 장악하고 있다.
노쇠한 군벌 가운데 일부는 이제 보안 부대의 일원으로 등록되어 보수를 받는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여전히 독자적인 사적 보안군을 유지하면서 국가 권력에 저항하고 있다.
그들은 아편 경제와 연계되어 있으며, 지역 사회에 강제 노역을 부과한다. 그들은 전쟁 연간에 조국을 떠난 사람들의 토지와 재산을 차지하는 부패 행위에도 연루되어 있다.
법무부가 승인한 등록 정당은 30개다. 그것들 대부분이 군벌과 연계하고 있다.
당신의 아프가니스탄 경험을 요약해 달라.
아프가니스탄은 천연 자원이 무궁무진하며, 전문 직업과 산업, 농업 분야의 숙련 노동력도 풍부하다. 이 숙련된 노동 인구의 상당수가 지난 25년 동안 이란과 파키스탄에서, 그리고 일부는 서방에서 살았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경제는 여전히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으며 이 숙련된 노동력을 흡수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에서 교육 받은 엔지니어 다부드(Davoud)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프가니스탄에 가서 나의 용역을 제공했다. 미국의 앞잡이 국가 행정부는 우리가 재건 작업에 참여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미국은 군벌들과 협력해서 탈레반 세력을 축출했고, 여전히 그들과 협력하고 있다. 그들은 국가의 자원을 나눠먹는 데에 공동의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영국 출신의 교육 받은 여성 실업가 샬라(Shahla)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 조국의 재건을 돕기 위해 왔다. 그러나 이곳에는 내가 발붙일 자리가 없다. 재건 사업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일확천금을 노리는 끔찍한 욕망만이 춤추고 있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은 이란과 파키스탄으로 돌아가 불법 노동을 하는 수밖에 달리 대안이 없다.
토캠(Torkham) 소재의 아프가니스탄 연구 및 평가 위원회(Afghanistan Research and Evaluation Unit)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파키스탄과의 한 접경 지역에서는 하루에 16만 명이 파키스탄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이동하고, 19만 명이 거꾸로 이동한다고 한다.
군벌들이 아편 경제에 관여하고 있다. 국민의 절대 다수가 생존을 위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국제 기구와 서방 정부들은 군사적 마약 척결 작전과, 법률적 강제를 대안적 경제 행위를 결합하는 장기적 해결책 사이에서 계속 입장을 바꾼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한 진정한 노력은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국제 보안군의 준재가 긍정적이라는 주장이 계속되어 왔다. 국제 기구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인터뷰한 다수의 아프간인 여성 인권 활동가들은 이렇다 할 재건 사업이 전무하고 침략군이 주둔하는 상황이 분노와 적대감을 조장한다고 본다.
유엔 기구들과 NGO들은 개발을 지원할 권한과 자원이 전혀 없다. 그들은 더 많은 기금을 끌어모으고 사업을 지속하기 위해 자신들의 지원 프로그램이 성공했다고 과장해야만 한다.
나지아는 이렇게 말했다. “여성의 권리, 인권, 민주주의라는 말은 겉꾸밈 용으로 위에서 부과된 것이다.
“국제 기구는 아주 많다. 일부는 최선을 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다.
“사람들이 굶주리고 병이 들었는데도 이런 문제가 그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일부는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까지 위협을 받고 있다고 느꼈다. 선의를 갖고 있는 이 기구들이 아프가니스탄 민중의 삶을 개선하는 데에 기여하고 있는지 아니면 의식하지 못하면서 신식민지적 재건 사업에 협력하고 있는지에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표명하고 있다.
또 다른 인터뷰 상대 파티마(Fatima)는 이렇게 믿고 있었다. “여성의 권리와 인권의 문제는 권력을 잡은 사람들이 자신의 목적에 따라 사용하는 구호이자 도구가 되었다.
“나는 평범한 남녀와 함께 일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이슬람이 여성에게 권리를 부여했다고 설명하려고 애쓴다. 이것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고,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이슬람 문화의 긍정적 측면을 보여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외부로부터도 아니고 민중의 종교와 문화를 모욕하지 않으면서도 말이다.”
서방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미국의 헤게모니와 이 지역의 에너지 자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한 술책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아프가니스탄의 여성과 남성은 독자적으로 그들과 맞서 싸울 능력이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조국을 건설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최선인 것들을 결정하고 시행할 능력은 있다.
그들은 전 세계의 남녀가 신보수주의자들의 제국주의 정책을 저지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들의 정책은 전쟁과 테러의 악순환을 지속시킬 뿐이다.
☞ 엘라헤 로스타미 포비는 런던 SOAS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녀의 최근 연구 주제는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투쟁과 저항 및 강제 집단 이주 공동체에 관한 것이다. 경제 및 사회 연구 위원회(Economic and Social Research Council)가 여기에 기금을 대고 있다.